특별 기획-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
<캠퍼스 줌인> 계사년 특별 기획으로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을 연재한다. 자신의 뜻과 꿈을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자랑스런 동문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특별기획취재를 마련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사회 발전에 기여한 분 등 학내 구성원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을 7회에 걸쳐 취재·보도한다. / 편집자 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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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는 일회성이다. 인생과 같다. 인생이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듯이 서예도 그어버리면 다시 덧칠 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야 하고 서예는 완전무결을 위해 하루라도 붓을 놓으면 안 된다. 붓글씨의 일회성을 생명력과 감동이 있는 예술로 승화시킨 이가 있다. 현재 학정 서예연구원의 원장으로 있는 학정(鶴亭) 이돈흥 동문(섬유공학·66)이다. |
오랜 친구를 새로 만나다 학정은 13세에 광주중앙초등학교 서예반에 들어가 처음으로 손에 붓을 들었다. “낯설지 않고 오랜 친구를 새로 만난 기분이었지.” 그는 “누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즐겁게 놀 수 있고 점차 확신을 키운다면 이미 그 일을 성립한 것이라 할만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 그의 오랜 친구를 만났고 신나게 놀았다. 무안 면성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서예반 활동을 계속했다. “많이 배우고 뜻을 튼튼히 하라”는 아버지의 엄명도 있었지만 서예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즐거움이었다. |
약관, 최고의 스승 밑에서 입문하다 학정은 우리 대학 섬유공학과에 입학한다. 신입생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에 앞서 한 달 뒤 아버지의 권유로 송곡 안규동 선생을 찾아뵙고 서예에 입문했다. 그의 큰 뜻과 잠재력을 이끌어 줄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송곡 스승이 하는 한약방으로 직행했다. 마루 바닥에서 배우고 또 배워 서예 공부에 흥이 났다. 그 당시 송곡 스승이 호를 지어줬다. “내 몸체가 학을 닮아서 학정이라는 호를 지어주셨지. 스승님의 호인 송곡도 소나무 송자로 학은 소나무에 살지 않나? 그래서 학을 쓰지 않으셨나 싶고 항상 학처럼 고고한 삶을 살라는 의미인 것 같네.” |
인생의 전환점을 돌다 그는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다지기 위해 ROTC에 지원했다. ROTC 생활을 하면서도 전공보다 글씨에 빠져 지냈고 어느덧 육군 소위로 임관한다. 학정은 “낮에는 내 자유시간이 있어 글씨를 주로 썼다”며 “어떻게 보면 잠재적으로 글씨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학정이 27세가 되던 해 공대 학장으로부터 방직 회사 취직을 권유받는다. 이에 그는 서류를 구비해 송곡 스승에게 말했다. 그러자 송곡 스승은 그에게 ‘일심 위평생일편서심(一心 爲平生一片書心)’을 써줬다. 오직 한 마음으로 평생을 서법예술에 정진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일심으로 가르침을 따랐다. 학정은 “이 때 방직 회사에 가버렸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올바른 장부에겐 때가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돈 것이다. |
서예에 청춘과 영혼을 바쳐 전환점을 돌자 서예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1975년 광주호남 동천주교회 안에 학정서예연구원을 설립했고 79년까지 우리나라 최초 한문서당 호남동 성당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그 때 단순히 교양과목 차원에서 서예를 가르친 고생담이 학정서예연구원을 운영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됐어.” 80년 3월 30일, 학정 서예연구원을 전일빌딩으로 옮기게 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여기서 겪었다. 그는 ‘민주의 고향’인 광주 시민으로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오다가다 잡혀가는 학생이 많았고 전일빌딩도 불탄다는 소문도 나돌아 한 일주일 쉬었었지. 그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끔찍해.” 이후 학정은 활발한 대내외 활동을 펼친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들머리에 있는 ‘민주의 문’, 5·18 자유공원 표지석에 ‘5·18 자유공원’, ‘무등산 서석대’, 전남의 여러 사찰 등에 휘호했다. “하루에 반나절은 붓으로 시작해 붓으로 끝났지, 서예에 내 청춘과 영혼을 바쳤어.” 학정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베이징 개인전, 21세기 한국서예증진 10대작가 선정,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 수많은 직책 역임과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또 하나의 동반자, 학정서예연구원 이렇게 하루 내내 묵향을 맡으며 지내다 보니 그의 후학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학정서예연구원은 그의 또 다른 동반자다. 학정서예원구원은 학정의 지도아래 문하생들의 모임인 연우회를 주축으로 서예발표전과 대외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 안에 일정서력을 가진 남성회원들로 구성된 향덕서학회와 여성회원들로 구성된 지선묵연회를 통해서 전문적인 서예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행사로는 매년 개최하는 연우회 정기 회원전과 2년마다 열리는 향덕사학회전, 지선묵연회전, 그리고 연우회의 자랑거리인 전국학생서예공모전은 서예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회원들의 회비와 학정의 장학금으로 올해 30회째를 맞이한다. 2009년 연우회는 1981년부터 매월 회보를 발간하여 300호 특집 발간을 했으며, 30여명의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를 배출하였고 20여명이 전문서예학원을 운영하여 서예연구에 증진하고 있다. |
50년 서예 외길, 예술로 승화 그는 “서예는 비움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버리는 것은 욕심뿐만이 아니라 나쁜 생각, 습관까지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글씨가 나와요.” 젊은 시절 한 때 공모전 결과에 집착하다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글씨가 잘 써지질 않아 붓을 던지고 나가 술을 한잔 마시고 들어와 ‘텅빈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 그는 “이튿날 보면 술기가 묻어 괴상한 글씨도 있었지만, 의도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좋은 작품이 나오더라”며 웃었다. 또 “서예란 재능만 가지고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닌 독서 등을 통해 인간 수양 요소가 쌓였을 때 제대로 된 글씨를 완성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서예원 벽에 걸린 ‘수(守)·파(破)·이(離)’는 그의 서예 철학을 대표하는 글이자 신념이다. 그는 “배우고 익힌 뒤, 격을 깨뜨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으면 원칙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의 글씨는 글씨에 기맥이 이어져 물이 흐르듯 하면서 통렬해 ‘학정체’로 불린다. 학정체는 17,18세기 중국과 다른 우리의 서체를 써야 한다는 자각의 결과로 나온 ‘동국진체’에 닿아 있다. 또 예서체의 획을 따 만든 이 원장의 한글 작품도 독특하다. 그의 글씨는 강함과 유함의 내재, 고상한 운치와 깊은 정감이 느껴진다. 학정은 “사람들은 내 서체를 학정체라 부르는데 나는 아직도 나만의 서체가 완성이 안 됐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예술분야 계획에 대해 묻자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서예를 통해 정신적 수양을 할 수 있는 서예관을 좀 더 정립하고 싶다”며 “가르칠 수 있는 한 후학 양성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
진실, 정의 바탕으로 인성 갖춰야 학정은 “젊은 사람들은 큰 포부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그마한 포부부터 점차 이루어 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했다. “작은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큰 일만 지향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여기서 작은 일이란 자신의 인성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단,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인간 됨됨이를 갖춰야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어떠한 것을 하더라도 진실과 정의를 갖추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하죠. 인성을 제대로 갖춘 자만이 언젠가는 큰 그릇이 됩니다.” |
글·사진= 신대희 sdhdream@gmail.com |
<이돈흥 동문 주요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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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전남 담양 출생 ▶1966년 섬유공학과 입학 ▶1972년 전라남도전(8회) 서예부문 수석상 ▶1975년~현재 학정서예연구원장 ▶1978,79,81 대한민국 국전 입선 ▶1984,85,87,8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작가 ▶ 2000,200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장) ▶2005년 국제서법서예가협회 창회, 회장, 광주시립미술관 초대 올해의 작가전 ▶2007년 (사)한국미술협회 수석부이사장, 베이징 개인전, 북경대학교 서법연구소 초빙교수 ▶21세기 한국서예증진 10대작가 선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