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연구소’의 설립 배경과 목적은 무엇인가?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학문적 탐색과 민주주의 발전 및 인권 향상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덧붙여 민주주의와 인권의 요람이라는 우리 대학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기 위함도 있다. 5·18은 10일 동안의 항쟁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5·18 연구소는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 가치와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발현된 하나의 장이라 보면 되겠다.”
‘5·18 연구소’가 주로 하는 일과 규모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린다. “크게 연구·교육·출판 사업, 학술행사, 초청강연회, 국제교류 사업 등으로 나뉜다. 연구 측면에서는 한국연구재단 중점연구 사업으로 다양한 연구주제를 선정·지원했다. 주로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 매년 5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왔으며, 5·18 관련 논문집, 연구총서, 자료집, 항쟁을 알리는 교재 발간, 5·18항쟁과 민주 인권 교양과목 개설 등을 통해 항쟁에 대한 학문적 기초를 다지고, 항쟁의 숭고한 이념을 미래 민주주의 가치로 승화시켜 내고 있다.”
지금까지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가 있다면 알려 달라. “지금껏 몇 가지 기억할만한 연구 성과를 꼽아 보겠다. 첫째, 제주 4·3항쟁과 5·18항쟁을 비교분석해서 공동연구를 수행한 점이다. 컨소시움을 형성해 2권의 책을 발행했다.(2001~2002) 즉, 두 항쟁이 가지는 역사적 흐름과 의미를 분석했다. 둘째, 아시아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연구를 했다. 태국, 일본, 싱가포르의 역사를 한국민주화운동과 견주어 가면서 인권의 가치를 재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2006~2011) 셋째, <뉴 폴리티컬 사이언스> 2003년 7월호에 5.18 광주항쟁과 한국 민주주의를 특집으로 우리 연구원들의 논문이 대거 실렸다. 국내 광주항쟁 연구가 미국의 동아시아 연구자들 뿐 아니라 제3세계 학자들에게까지 성공한 민주화 혁명의 모델로 알려지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본다. 넷째,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학술지를 2001년부터 꾸준히 발간해 오고 있다. 기존 연 2회 발간에서 2008년부터는 연 3회(4월·8월·12월 20일) 증편 발간 중이며 2009년에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 선정됐다. <민주주의와 인권>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 문제의 체계적인 연구를 중점으로 삼고 있으며 장기적이고 세계적 관점에서 5·18항쟁을 접근 중이다.일례로,‘5·18소설의 민속문학적 연구’,‘국가폭력, 하나의 사건과 두 가지 재현’,‘인권 거버넌스의 실현으로서 인권도시’등의 논문이 게재되고 있다. 다섯째, 5·18항쟁 25주년 맞아 2005년 5월에 개관한 ‘전남대학교 5·18기념관’을 설립했다. 이는 항쟁의 기억을 복원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 전시해 놓음으로써 관람객들에게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5·18 민중항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저는 81년 9월에 우리 대학에 부임해 광주항쟁을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부임 후 매년 5월마다 계속되는 추모와 기념행사들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81~1983년엔 5·18이 사회적으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5·18항쟁에 대해 말도 못했다. 5·18 관련자들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시절이다. 그러다 1988년에 정부가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 공식사과 후 추모 열기가 급속도로 진전됐다. 이러한 경험뿐만 아니라 기존에 갖고 있던 역사적 인식들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다. 연세대학교 안병현 교수가 쓴 <광주 시민 앞에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라는 책이나 깨어 있는 학자들의 1980년 5월“나는 그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등의 자신의 양심에 대한 고백들과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공감한다. 그런 점들이 상당히 자극이 돼 광주항쟁에 대한 멍에를 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5·18 민중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으로 5·18을 명명하는 시각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궁금하다. “입장과 시각의 차이다. 5·18을‘제도권’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민주화운동으로 본다. 국가권력에 기반한 공식역사기록 입장이다. 그런데 이것을‘비제도권’에서 볼 때 민중항쟁으로 보여질 것이다. 사회 변동을 지향하는 저항의 눈에서 볼 때 광주 5·18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려는 민중항쟁으로 인식한다. 5·18항쟁은 국가권력에 의해 인정은 받았다. 하지만 권력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억압과 강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국가가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권력과 항쟁 간에는 근원적인 경쟁이나 모순이 있기 마련이다. 올해 망월동 보훈처에서 경과보고를 하는데 군대가 무슨 말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안타깝게 많은 사람이 피해를 받았다. 인권을 중시해야 한다.”이런 피상적 발언으로 경과보고가 이뤄진다.“누가 어떻게 피해를 주었느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이런 식이 국가권력이 갖는 속이다. 덧붙여 5·18 기념재단도 국가의 물질적 지원을 받다보니깐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하지 않아 운동권 세력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이 5·18 정신의 계승과 확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보나 “역사적으로 볼 때 5·18 항쟁의 의미를 국가에선 최소한으로 줄여서 기린다. 국가기념일 제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 운동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은 오월 정신을 최대한 확장시켜 계승한다. 절대·자치·역사공동체, 헌신, 희생 등의 정신은 인류사회가 국가 권력과 관계없이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국가권력을 늘 비판하고 감시·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5·18의 진상규명 정도, 피해자 보상, 명예회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진상규명이라는 것은 정도의 문제라 생각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극명하게 규명이 돼야 할 부분은 암매장 피해에 관한 문제, 사망자·피해자에 대한 통계가 미흡한 점 등이다. 무등정신원 부량 청소년들 200여명이 5·18 이후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이 이야기는 공수대원의 양심선언에도 나왔다. 자기가 어느 곳에 매장한 시체도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군대의 작전 수행에 대한 지휘체계도 밝혀져야 한다. 군은 지휘체계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피해자 보상 측면에선 5·18 피해자들만큼 보상을 잘 받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보상이 완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도 병상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현재 공법 단체, 연금 문제 등이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명예 회복에 관해선 피해자들이 국가 민주화유공자로 규정이 돼 생계, 복지, 취업, 장학지원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보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해놓으니 문제가 생긴다.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지나가다 살짝 다쳐서 민주화 유공자가 된 사람)이 유공자가 된 경우,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은 균형이 맞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투쟁에 참여했느냐 참여하지 않았느냐를 구분하는 데 난해함이 있다. 민주화유공자에 대한 부분도 진실하게 고찰해봐야 한다.”
5·18 기념행사들을 어떤 방향으로 꾸려가야 하는 게 바람직한가? “제가 최근에 1981~2011년까지의‘오월행사’를 전부 조사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1983년까지는 국가기관의 탄압으로 봉쇄된 추모제였다. 6월 항쟁을 거쳐 1988년에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면서 1992년까지 매해 10만 명 이상이 추모제와 행사에 참여했다. 이처럼 기념행사는 정치·사회적 국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실상 혁명적인 열기가 한결같을 수는 없다. 과거에 비해 참여가 부족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올 5월 한 달 동안 행사위원회에 등록된 행사가 60여 개다. 이처럼 광주에는 저항적 운동성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30년이 지나도 뜨거운 열기의 민주행사를 이어가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 이에 오월행사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야 한다. 오월행사는 1988년부터‘오월행사 위원회’가 추진 중이나 한시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개선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껏 4월에 출범해 행사가 끝나면 사라지는 조직이었다.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기구로서 안정된 체계가 없다. 오월 행사를 다방면에서 분석·축적하는 과정이 미흡했다. 행사의 다양성과 참여를 늘리기 위해 올 행사가 끝나고 평가회의를 개최했다. 적어도 2월 중에 위원회를 꾸려 다양한 행사 아이디어를 수렴하는 등의 체계적 운용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존의 5·18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았거나 재조명해야하는 분야 및 테마가 있다면? “시민군들의 최후항쟁, 그 당시 종교계의 역할, 진상규명 정도 등이 있다. 현재 전체적으로 심층적 연구에 한계가 많이 있다. 5·18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체계성이 필요하다. 학문적으로 지금은 표면적인 연구라고 본다. 사실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 필요하다. 예를 들어, 광주 민중항쟁, 부마항쟁, 6월 항쟁 등이 어떻게 하나의 역사적 흐름을 만드느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5·18이 호남지역만의 이슈로 협소하게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 보나? “현실적으로 지역적인 문제가 작용했다고 본다. 지역감정 유발로 이끌고 간 보수 세력 및 언론의 영향이라든지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으로 인해 5·18이 협소하게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오월정신을 기리려는 노력들을 많이 보고 있다. 올해에도 경북 안동, 대구, 인천, 대전, 부산, 독일 등지에서 5·18 관련 행사가 있었다.”
5·18 정신의 전국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가장 중요한 것은 80년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공감·이해시킬 수 있는 교육 체계를 갖춰야 한다. 5·18에 대한 올바른 공감과 이해는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을 발현시키는 단초가 된다. 이는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자본의 독재에 대한 저항, 봉사정신의 생활화, 현실주의적 대학문화에 대한 반성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5·18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공동체 정신, 정의를 위한 치열성, 희생정신 등을 5·18 정신의 핵심으로 꼽고 싶다. 80만 인구 전체가 하나로 되었던 절대공동체의 실현은 오늘 날 회자하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원형이다. 또 부당한 폭력에 굴종하지 않는 무장투쟁의 치열성은 한국 사회 운동사에서 불멸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어 역사 앞에 당당하기 위한 희생정신은 광주를 한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민주도시로 만들었고, 아시아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되었다. 우리가 명예로운 역사를 향유하게 했음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사실 광주시민 대다수가 이러한 5·18항쟁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계승에 대해 체감도가 강하지 않다. 우리가 역사의 주체고 오월항쟁의 역사가 전 세계 인류의 자산이 됐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그 가치를 깊이 공감하고 성찰하며 삶으로 표출하는 것이 오월정신의 계승이다.”
앞으로의 연구소 운영 방향과 연구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린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과 5·18항쟁 및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를 통해 일반인에게는 항쟁의 참의미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전달하고, 전문 연구자에게는 5·18항쟁과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아시아와 제 3세계 민주, 인권, 평화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개인 및 시민단체와 연대의 폭을 넓히고 국내외 다른 연구기관과의 교류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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